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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돌궐의 관계, 오스만 제국까지의 여정 [튀르키예]

파트너링크 2022. 12. 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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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튀르키예

돌궐 또는 괵튀르크, 괵튀르크 카간국은 괵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에 건설한 튀르크족 최초의 카간국이다. 알타이산맥의 남쪽에 살며 알타이산맥의 모양이 투구와 비슷하였는데 투구를 돌궐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를 이름으로 했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에 따르면 돌궐어로 튀르크는 강하다라는 의미이다.

 

알타이산맥

돌궐의 민족인 괵튀르크족에 대해서 중국인이 사료를 살펴보면, 괵튀르크족은 흉노의 일파이고 그들의 성은 아사나씨, 괵튀르크족의 선조는 평양에 거주한 잡호이며 성은 아사나씨, 아사나의 500가(家)가 금산(알타이산맥)에 기거하면서 제철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수나라

수,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이었다. 돌궐은 수나라와의 전쟁, 내부분열로 인한 수나라의 이간책으로 583년 동서로 분열되었다. 동돌궐이 세력이 약해진 수나라를 공격하였다. 세력이 위축된 수나라는 동돌궐에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공녀로 보내게 되었다. 수나라는 공물과 함께 네 차례 4명의 수나라 공주를 보냈다.

 

살수대첩

6세기 후반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겼고 동돌궐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그 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수나라는 멸망하였고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세력을 회복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오르혼 비문 중 퀼테긴 비문

하지만 당나라에 의해 동서돌궐이 멸망하였고 30년의 돌궐의 암흑기가 지난후 쿠틀룩이란 지도자가 나타나 돌궐을 재건하여 후돌궐 시대를 열었다. 후돌궐은 빌게 카간 때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이 시기에 세워진 오르혼비문(고대돌궐어)은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는 돌궐이 유연(서기 4~6세기 아시아 북방에 존재했던 북방 민족 국가)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유연은 고구려와 동맹국이었고 돌궐과는 자연스레 대립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돌궐이 유연을 정복한 후 거란, 말갈과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당나라가 건국되자 돌궐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했고 고구려와 형제 국가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 관계는 돌궐의 오르혼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문에는 '돌궐의 왕이 죽자, 로마, 중국, 키르키스...고구려에서 온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해 슬퍼했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비문에는 동쪽에서 해 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에서 문상객이 와서 애도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뷔클리(맥코리)라고도 읽는데 맥족 고구려라고 해석되고 있다.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당시 돌궐과 교류했던 동로마 문헌에도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서돌궐의 속했던 유목민족이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 생활을 병행하다가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일부 세력은 계속해서 터키 지역까지 이동했다. 960년경 셀주크 장군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 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한 튀르크 일족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건국했으며 룸셀주크의 세력이 약화된 후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1세가 오스만 공국을 건국(1299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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